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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의 생애 연구

Subject

The study of Mac Lee, Ilsibdang

저자 노종상
Author Roh, Jongsang
발행년도 2022
초록 이맥李陌(1455∼152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그는 단종 3년/세조 원년
에 출생하여 조선 연산군(재위 1494∼1506), 중종(재위 1506∼1544) 연간에 정랑,
대사간 등을 거쳐 종2품 관직인 동지돈녕부사의 지위까지 올랐다.
본고는 이맥의 생애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논의하였다. 첫째, 유학자 이맥이다.
유학이지만, 좁혀서 성리학자이다. 성리학이 국가 이념이었던 조선조에서 종2품 관
직까지 올랐던 문신이었다면, 본고는 그를 성리학자라고 부른다. 둘째, 관료인 이맥이
다. 그는 늦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이후 사망할 때까지 관직
을 떠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사망할 때까지 관직에 있었던 그는 뼛속 깊은 관료인이
었다. 셋째, 역사가 이맥이다. 그는 춘추관 편수관으로서 사관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민족사서 『태백일사』를 편찬한 역사가였다.
1) 유학자 이맥에 관해서 : 이맥은 유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의 할아버지
는 세종 시대에 좌의정을 지낸 용헌容軒 이원李原(1368~1429)인물이다. 그의 형은
예조· 호조· 병조참판을 지낸 청파靑坡 이륙李陸(1438∼1498)이다. 마흔이 넘은 나
이에 문과에 급제한 이맥은 대간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조의 국시인 성리학을 지키기
위하 숭유억불을 주창했던 인물이다.
2) 관료인 이맥에 관해서 : 이맥은 생애의 대부분을 관료로 지냈다. 그러나 이맥은 불운
과 굴욕, 그리고 영광이 점철된 관료인의 삶을 살았다. 그는 사헌부 장령으로 활동할
때, 연산군의 총희 ‘장녹수’ 장숙용을 탄핵하였다가 유배를 갈 정도로 대쪽 같은 선비의
품성을 지닌 사대부였다. 그는 관료생활 내내 무고와 모함, 질시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인으로서 생을 마친 것을 보면 그의 인물됨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3) 역사가 이맥에 관해서 : 고성이씨 가문에는 민족사학 정기가 맥맥히 흐르는 가문이
다. 고성이씨 가문에서 민족사학의 씨를 뿌린 인물은 7세 이존비李尊庇(1233∼
1287)였다. 고성이씨 가문 중흥조와 같은 인물인 이존비는 손자요, 고려 말 공민왕
시대에 수문화시중을 지낸 9세 행촌 이암李喦(1297∼1364)의 사표가 되었다. 이암
은 민족사학의 튼튼한 줄기가 되어 『단군세기』라는 민족 사서를 남겼다. 그는 후손인
13세 이맥의 사표가 되었다. 이맥은 『태백일사』(8권)라는 민족 사서를 남겨 고성이씨
는 물론 민족사학에 빛나는 꽃이 되었다.
키워드 이맥, 성리학자, 관료인, 역사학자, 민족사학
Abstract Mac Lee(1455∼1528) is a government official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He was born in the third year of the king Danjong/the first year of the king Sejo. He was
promoted to the Dongjidonnyongbusa, which was the second grade ranking
government post after serving in various high-ranking offices, such as the Jeonglang,
and the Daesagan during the era of Yeonsangun(1494∼1506) and the era of king
Jungjong(1506∼1544).
In this paper, I studied about Mac Lee's life, classifying 3 parts. The first part is Mac
lee as a confucian scholar. Correctly speaking, he is a Neo-confucianist. In Joseon
dynasty, the Neo-confucianism was the state ideology. Also, he was the high-ranking
official. Therefore, I could consider him to a Neo-confucianist. The second part is Mac
Lee as an official. He'd had the government post until he died. In other words, he was
the official to the bone. The last part is Mac Lee as a historian. He was not only the
Pyeonsugwan in Chunchugwan but also a writer who wrote Taebaeckilsa, a historical
book.
1) Mac Lee as a confucian scholar : He grew in a confucian's family. His
grandfather was Won Lee, Yongheon, the first vice-premier during the era of
King Sejong. His brother was the Ryuck Lee, Chungpa, the minister of war. Mac
Lee had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over 40-year-old, and became the
Daegan. At that time, he asserted to revere Confucianism, not Buddism.
2) Mac Lee as an official : In most of his life, he was an government official.
However, his life was a series of misfortune, indignity, and glory. However, he
was a very determined and single-minded man. When he was the Jangryeong
of Saheonbu, he was exiled because he had denounced Jangnocksu, the
Yeonsangun's favorite mistress. Although he suffered from a slander and
jealousy, he died as an official.
3) Mac Lee as a historian : There were the spirit of the national historiography in
his family. The very first man, who had started studying the national
historiography, was Jonbi Lee(1233~1287). He became a guiding star to Am
Lee, Haengchon(1297∼1364), who was the Sumunhwasijung in the era of the
king Gongmin of the Koryeo Dynasty. Am Lee became a strong stem of the
national historiography and wrote Dangunsegi, a historical book. He become
a guiding star of Mac Lee, who wrote Taebaeckilsa and finally became the
beautiful flower of the national historiography as well as his family.
Keywords Mac Lee, Neo-confucianist, historian, Ilsibdang, Taebaeckil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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