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는 한민족의 시원역사와 뿌리문화를 전해주고 있는 지보지서至 寶之書이다. 그러나 기존의 강단 사학자들은 위서僞書 라고 폄하하면서 그 가치를 부 정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기존의 사학 계에서 풀지 못하고 있는 난제들을 객관적으로 증명하여 『환단고기』가 진서眞書임 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사료된다.
첫째 「세종실록」과 권제가 지은 『역세년가』에서는 단군의 역년이 1048년이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에서는 고조선의 초단군의 건국년인 서기전 2333년 부터 21 소태단군이 물러나는 서기전 1286년까지를 고조선의 제 1왕조시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간이 1048년으로 후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 『삼국 유사』에서는 단군의 수명이 1908세라 하는데 이는 백악산 아사달에 도읍했던 제 2왕조 시 860년에 제 1왕조시 1048년을 합한 숫자로 역시 기존 사서에 한 기록을 증명해주고 있다.
둘째, 광개토태왕비에서 고주몽성제가 북부여에서 나왔고 광개토열제가 17세손이 라 하는데 『환단고기』는 고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인 해모수의 4세 후손으로 북 부여왕족의 혈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또한 북부여의 7 단군으로써 북부여의 왕통 을 계승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고주몽성제로부터 광개토열제는 13세손인데 해 모수로부터 기원하여 4세를 합산하면 17세가 된다.
셋째, 1915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발견된 금동석가불상에 새겨져 있는 건흥오 년建興五年 세재병진歲在丙辰의 해석에서 『환단고기』에서 건흥은 장수열제 때의 연호 라 하고 장수열제는 412년 임자壬子에 등극하고 고구려의 즉위년 칭원법에 따 라 건흥 5년은 서기 416년이 되며 이해의 간지가 병진임으로 위의 석가불상은 416 년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이 명확하다. 이를 통해 환단고기의 위한 가치를 재발 견 할 수 있다.
넷째,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묘지명이 출토되 었고 이곳에 연개소문의 아버지의 이름이 태조太祚이고 할아버지의 이름이 자유子遊 라고 하는데 이에 앞서서 1911년에 간행된 『환단고기』의 「고구려국본기」에도 『조기』를 인용하여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증조부의 이름이 광廣이라고 까지 기술되어 있어 『환단고기』의 기록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